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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 - 어머니의 낙(樂)시(詩)/시(詩) 2022. 4. 24. 19:52
아침나절 안개 가득하다는 고향 소식에
집에 있으라던 당부는 잊었는지
수화기 너머 신호음만 파도처럼 들린다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하게 갯가로 스며들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스멀스멀 앞섬이 사라지고 하나둘 능선이 지워지면
낮은 집들도 자우룩하게 잇대어지는 거문도
갯가로 나선 길 따라 마음 길이 그렁그렁 보인다
인동초 흐드러진 서당이끼미 지나며
화전놀이 하던 어여뻣던 시절을
걷다 걷다 뻐꾸기 소리 들리면
까슬까슬한 보리 이삭 주웠던 때를
갱번에 닿으면 가마때기 쭉 깔고 멸치를 말리던
풍요로운 한때가 그리워서
사무치게 그리워서 그 길을 걷는다는 걸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느지막이 돌아오는 길 따라
은하수 흩뿌려진 새하얀 아미초 꽃길 지나
노란원추리 가득한 언덕에 걷다 쉬다 걷다 쉬다
도착했을 거라는 걸 알고도 남는다
해거름에
수화기 닳도록 들었다 놨다며 투정 부리니
출렁이는 목소리로 안개 다 걷혔다며
이 빠진 웃음 사이 고동과 보말 따고
가쁜 숨 내쉬며 거북손과 담치 캔 이야기
수만 겹 파도소리 들려주며
그거라도 해 보내야 낙(樂)이재 하신다
(그림 : 양준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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