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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점 - 풀의 공법으로시(詩)/시(詩) 2021. 10. 18. 18:59
맥없이 키만 자란 풀이 흔들린다
아무것도 감고 오르지 못해 사소한 바람에도 휘청거린다
처음엔 이파리만 흔들리다가 나중엔 줄기까지 흔들린다
흔들림에 취한 듯 온몸이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용쓰지 않고 물 흐르듯 흔들린다
풀은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꽃이 핀다
꽃이 필 때면 풍선처럼 가벼워져 더욱 더 흔들린다
풀은 저희끼리 몸 부비면서도 순간순간 흔들린다
때로는 제 몸이 흔들리는 줄도 모르고 흔들린다
흔들릴 때마다 깊은 곳에서 굵어지는 것이 있다
단단해지는 것이 있다
불끈 쥐고 버티는 갈퀴 같은 손이 자라고 있다
자라고 또 자라도
풀은 흔들리는 힘으로 끝까지 나무가 되지 않는다
어떠한 폭풍우에도 우드득 부러지지 않는다
뿌리 뽑히지 않는다
풀은 버석버석 말라서도 선 채로 흔들린다
죽지 않았다고 끝까지 서걱거린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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