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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자랐다
날카로운 햇살이 아무렇게나 찌르는 곳에서
바람을 타는 말은 음지에 뿌리 내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입술을 모으는 사람들
바람은 언제나 물기 많은 쪽으로 불었다
어느 방향으로도 소속되지 못한 내가 바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던 건 태생이
들판이어서라고 소리 없이 쓰러지는 이름을 가져서라고
잘린 삶이 절뚝이며 걷는다
바람에 선동당한 꽃잎, 하늘은 그대로 하늘이고 햇살은 그렇게 햇살이고
구름이 한가롭다 흔들리는 내가 파문으로 번진다
근사한 이름을 가지지 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겁의 겁을 건너온 시간이 방향을 비튼다
질긴 뿌리로 지탱하는 게 결핍이라면
내 뿌리가 비로소 근원이고 비로소 내가 된다는 말
나는 들판에 모태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살았다고 더 많은 바람을 맞을 거라고
들을 매운 내가 너머로 너머로 끊임없이 자란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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