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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온윤 - 유리 행성시(詩)/시(詩) 2020. 11. 14. 22:11
안경을 쓰면 더 멀리 상상하고
더 멀리 슬퍼하고
멀어지는 사람은 얼마나 멀리까지 뒷모습을 보여주는지
오랫동안
우리는 길고 긴 복도 같은 일인칭을 걷고 있었다
눈이 어두운 우리는 불빛만을 향해 걸어서
옆에 누군가 나란히 걷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눈이 어두워서
밤과 낮을 구분할 줄 모르는 심해어처럼
우리는 꿈과 꿈 아닌 것을 구분할 줄을 몰랐다
시선을 꺾는 순간 풍경이 되어 멀어지던 너는 마른 목초지였던가
폭설 같이 빛이 내린 설원이었던가
눈을 자주 잃어버리던 네가
몸을 잃어버리고 안경이 되었을 때
나는 슬픔을 똑바로 보기 위해 안경을 썼다
그때부터 세상은 밤의 목초지, 오래된 설경, 꿈과 꿈 아닌 곳
너무 빠르게 회전하는 행성 같아서
이렇게 어지럽고 비좁은 곳으로 너는 발을 딛고 걸어갔구나
이 유리알 같은 행성 속에 네가 들어있구나
우리는 안경 너머 바라보는 유리의 인칭을 사랑했다
더듬더듬 서로의 피부 위로 뿌연 지문을 남기고
창틀 같은 시야 위로 자욱한 입김이 번지고
네가 눈 속에 들어온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저 멀리 지평선처럼 멀어졌다가
아득히 사라지는 뒷모습으로
나란한 옆모습으로
우리는 언제나 같은 문을 열고 같은 너머를 열고
같은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림 : 안모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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