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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헌 - 유랑하는 달팽이시(詩)/시(詩) 2020. 8. 25. 18:41
해남에서 온 채소를 다듬다가
잎사귀 사이로 웃으며 걸어 나오는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깜짝 놀라 일손을 멈추었지만
조금은 귀여운 몸짓에 안도하며
나 또한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제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 메고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도시를 유랑중이라며 일박을 청했다
나는 배낭 속 소지품이 궁금했지만
달팽이는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루하던 식당이
배낭 멘 여행객으로 생기가 돌았다
농수산물 시장을 둘러보고
싱싱마트를 경유해 왔다는 달팽이는
주방 구석에 마련된 거처에서
하루의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출근한 나는 여행객에게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벌써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의 개천을 둘러보고 싶다고
넌지시 도움의 손길도 내밀었다
주방아줌마가 챙겨준 간식거리를
비밀의 배낭에 꼼꼼히 챙긴 다음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개천까지 잘 배웅해주었다
(그림 : 이현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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