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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동 - 은행나무 여관시(詩)/시(詩) 2020. 8. 16. 15:01
오백 년을 살았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
동구 밖에 서 있다
모진 풍상으로 군데군데 가지를 잃은 은행나무
내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
누군가 외딴 길 가에
꼬챙이 같은 기둥 몇 박아 세웠을 초라한 여관 한 채
한때는 넉넉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길손들의 지친 몸을 풀어주었을,
나는 지나는 길에 차를 세우고 길손이 된다
문을 두드리자 백발의 주인장이
허리춤을 올려 쥐고 짚신짝을 끌며 나온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마꾼들이 배꼽을 드러낸 채
처마 아래 드러누웠고
댓돌 위에 꽃신이 가지런하다
주인장의 안내로 들어선 방안에 벌렁 드러누워
목침을 베고 누우니 여관 문밖이 소란하다
길 잃은 선비가 하루를 묵으려는지 발 고린내가 풍겨온다
내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사이
하늘을 날던 자동차가 여관 앞에 멈추고
주인장은 또 짚신짝을 끌며 문을 나선다
나는 백년 뒤 이 여관을 찾아올
또 다른 나를 위해 주섬주섬 여장을 꾸린다
(그림 : 김병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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