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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였던 거다.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밑을 내려다본 흔적,
내리고 싶을 때 내려갈 수 있는
거기까지가 뿌리에 묶인 꿋꿋한 길이었다
잠자리들 수평을 고르는 그쯤
잎사귀 저어 중심을 솎고
철없는 메꽃에나 감겼으면 사무쳤을 생인데
오를수록 공것 같은 허공,
오르면서 세우는 그만큼의 벼랑을 끼고
휘청거리는 순간순간이 황홀해서
그림자조차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린 거다
한 칸 더 쌓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더 오를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그쯤
어지러운 화관을 틀고
익어야 한다는 건 자기 연민의 극,
바람 들어 수시는 마디마디
디뎌지지 않는 바닥 헛짚어 기울이며
빼빼 말라가는 수수깡들
내려오는 길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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