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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은
내가 걸어온 길가에 놓인 낡은 의자를 사랑한다
그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간 사람들을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도 엉덩이를 밀치고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걸어오면서 남긴 발자국에 고인 빗물을
빗물에 비친 푸른 하늘을
그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져간 새들을 그리워한다
앉을 때마다 늘 삐걱거리기만 했던 낡은 의자에
그래도 봄눈이 내릴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먼 데서 날아온 풀씨들이 수줍은 듯
꽃을 피울 때가 자장 기뻤다고
삶은 어느날 동백꽃 한송이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일이었다고
오늘도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해질녘 막다른 골목길
독거노인의 낡은 의자에 앚아
풀꽃을 사랑하던 귀뚜라미를 그리워한다
(그림 : 이기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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