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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 - 여름에 대한 한 기록시(詩)/시(詩) 2018. 9. 17. 19:47
나는 한 아름다운 집을 기억합니다
여름에 그 집은 더욱 아름다웠고 하염없었습니다
그 집은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의 한 동네
막다른 길 끝에 있었습니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한여름에도 동네 길을 오릅니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야트막했고
제일 헐어 보였습니다
기와지붕은 비닐로 덧대고 돌로 눌러 놓았습니다
대문은 나무로 짠 구식이었는데
하늘색 칠이 거의 벗겨진 채였습니다
이 집 사람들은 기와 고칠 염도
대문을 새로 칠할 염도 내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렇게 여름날의 산책에서 그 집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 모양새에 비해 뒤 터는 아주 넓었습니다
주위의 새로 지은 이층집 덩치들도
그 넓은 뒤 터를 막지 못했습니다
무 배추 상추 쑥갓 시금치 파 고초
뒤 터는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이름의 푸른 것들이 한껏 일궈져 있었습니다.
담장에 붙어 까치발을 하면 그것들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집의 노인네였을 테지요
양손에 호미와 물뿌리개를 나눠 든 노인네
호미와 물뿌리개를 놓고 다시
저쪽 가에서 물 대는 호스를 끌고 오는 노인네
노인네는 구부정한 등 펴는 법 없어
담장에 붙어선 나와 마주친 적 없습니다
한여름 내내 쉬는 날의 산책은 그 집을 향했습니다
동네의 막다른 길 끝
그러나 뒤 터 한쪽은 하늘까지라도 뚫렸지요
푸른 것들의 이름을 읽으려
담장에 붙어 까치발하곤 하던 나날
노인네 안 보이면
햇빛 아래 놓여진 빈 물뿌리개
푸른 것들 속에 끌어당겨진 호스를 대신 보았습니다
상추 시금치 쑥갓......
하고 읽어가다가
담 밑 어느 결에 놓여진
그물끈이 풀어졌을 그물의자를 대신 보았습니다
그물의자 등에 수건이 걸쳐져 있는 것을 대신 보았습니다
여름 햇빛은 그 집의 뒤 터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쏟아지는 이미지처럼
담장에 매달린 내 얼굴은 그 여름 내내
사과알로 발갛게 만들어져갔습니다.
(그림 : 임동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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