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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 얼음구멍시(詩)/시(詩) 2017. 12. 17. 14:21
저수지에 얼음구멍이 뚫려 있다
누군가 저 물 속으로 오래 들여다보고 갔나 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을 기억하기 위해
저수지는 온몸을 꽁꽁 얼리고 있다
얼음구멍 가장자리로 살얼음 조각이 떠있다
물방울에도 어떤 모서리가 있어서 둥근 얼음구멍 밖으로
투명한 결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빙어의 어신으로 고요한 그의 응시가 단 한 번 깨졌다는 것일까
단지 빙어가 기다림의 내용이 될 때는 아름답다
그의 내면을 회유하던 빙어가 한 번은 물 밖으로 나왔다는 듯이
둥근 얼음구멍이 잠시 출렁인다
얼음구멍을 통해 나는 그의 내면을 본다
말하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흔들리는 고요가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기다림의 형식인 셈이다
발밑으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인데
얼음구멍에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문득 살어음 엷게 깔리던 그의 눈빛을 생각한다
나는 얼음구멍을 다시 들여다본다
얼음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두 눈이 얼면서 오래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사람은 기다리면서 비로소 기다림의 내용이 된다
세상에서 사람이 기다림의 내용이 되는 것보다 외로운 일은 없다
(그림 : 김만중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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