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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섶섬이 보이는 방시(詩)/나희덕 2014. 6. 18. 14:42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아고리와 발가락군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섶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에 있는 섬이다. 서귀포시에서 남서쪽으로 3㎞쯤 떨어진 무인도이다.
각종 상록수와 180여 종의 희귀식물, 450종의 난대식물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이 우거져 '숲섬'이라 불렀는데, 변음되어 '섶섬'이라 불린다. 한자로는 대부분의 문헌과 지도에서 '삼도(森島)'라고 표기했다
(이중섭 - 섶섬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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