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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림 - 찔레꽃은 피고
    시(詩)/신경림 2015. 6. 16. 12:42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 애를 찾아 헤매었나 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강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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