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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관 - 천국의 계단
    시(詩)/이준관 2015. 5. 26. 09:55

     

     

     

    짐을 들고 가는 여자가 언제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노 하고

    투덜대며 올라가는 계단이 많은 동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계단에서 하늘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하늘이 이기면 한 계단 내려오고

    아이들이 이기면 한 계단 올라가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계단 끝집에는 해바라기 핀다

    해바라기에게

    금빛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태양

    아이들은 가을이면 손에 해바라기 씨를 받아

    태양에게 돌려준다

    태양은 그 꽃씨를 골고루 동네에 뿌려준다

     

    일숫돈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의 구두에는

    씹다 버린 껌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계단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이름을 외우며 올라가는 아이들에겐

    침이 꿀떡 넘어가는 무지개떡이다

     

    강아지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자고 간 계단에 앉아

    아이들은 무릎에 턱을 괴고 머언 하늘바라기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 닳은 몽당 크레용으로

    친구에게 줄 생일 카드처럼 서쪽 하늘을 빨갛게 색칠한다

     

    아이들이 탈 썰매를 끌고 온 순록의 뿔처럼

    전봇대가 서 있는 눈 오는 날에는

    아이들은 계단 옆에 눈사람을 세워둔다

    그러면 방울 모자를 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하이얀 양초 같은 집집마다 불을 켜 주러 계단을 올라온다

     

    아이들이 아침에서 저녁까지 신나게 불어대는

    구멍이 뿅뿅 뚫린 하모니카 같은 계단

    그 계단에 나도 발을 올려본다

    해바라기나 강아지나 아이들만이 만질 수 있는

    하늘을 만지러

    (그림 : 김은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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