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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빌려 줄 몸 한 채시(詩)/김선우 2014. 8. 4. 13:04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그림 : 주희홍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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