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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형도 - 가는 비 온다
    시(詩)/기형도 2013. 11. 26. 20:50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림 : 박혜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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