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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시(詩)/기형도 2013. 11. 26. 16:30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그림 : 박선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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