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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bert Frost
    시(詩)/시(詩) 2013. 11. 16. 13:30

     

     

    눈과 숲을 아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1. 전기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1963)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서, 11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매사추세추 주로 이사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급우였던 여학생(Elinor White)과 사귀게 되고, 후일(1895년)에 같이 결혼한다. 그는 다트무스 대학(Dartmouth College)에 입학했으나, 1학기도 못 마치고 중퇴한다. 그 후 가정교사나 정미소 직공, 신문 기자로 일하기도 한다. 23살에 하바드 대학에 특대생으로 입학하나 2년만 다니고 그만 둔다. 1900년도에 건강 때문에 시골에 양계업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직업적 농부보다는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시를 계속 창작한다. 1912년에 영국으로 이전하고, 영국에서 2권의 시집(소년의 소원, 보스톤 북쪽)을 내면서 유명해진다. 1915년에 미국으로 귀국하여 정착한다. 그 후 여러 대학에서 6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모두 청산하고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시 창작에만 전념한다.

         그의 시는 주로 영국의 조오지 왕조 시대 시인(Georgian poets)1)의 목가적 시풍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는 낭만주의 전통에서 낭만주의에 반기를 든 모던한 시를 쓴다. 그러나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서, 신비평에 의해 군소 시인 취급받는다. 허지만 미국적 시인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 시 낭송하고, 문화외교 활동도 하였다. 퓰리처상을 4회나 수상하고, 노벨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토속적인 어법과 번역의 난제로 인하여 수상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시집은 소년의 소원(1923), 보스톤 북쪽(1915), 산간(山間)(1916), 시선집(1930), 머나먼 목장(1936), 증인 나무(1942) 등이 있다.


    2. 시적 특성


        프로스트 시는 존재의 시다. 시적 기교나 언어성보다는 일상생활 및 언어로 인간 존재의 신비와 깊이를 읊어내는 시다. 따스한 저녁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전원 속에서 생의 추억과 깊은 울림소리를 전해주는 가슴의 시, 내면의 언어를 토해내는 시다. 인간 존재 근원은 너무나 평범하여서 새로운 언어 표현도 거부가 많다. 그의 시가 낭만주의 적 특성과 동시에 모더니즘 특성이 다분하나, 형식적 언어성보다는 존재와 사유를 표현하는 성향이 보다 강하다.  이러한 시는 신비평적인 분석과 이해를 초월하려 한다. 그냥 시를 읽으면서 가슴으로 확 느껴야 한다. 눈 오는 날 숲 속에서 같이 몸으로 느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는 신비주의 시, 종교시, 명상시, 범신론적 사유시가 아니다. 그의 시는 평범한 촌부의 지혜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비 오기 전에 낮게 나는 제비를 보며 소낙비 내릴 것을 예측하는 시골 할아버지의 지혜를 담아낸다.

         이러한 평범성 속에서도 그의 시에는 무언가 도달할 귀착점이 있다. 눈 속에서 돌아갈 따뜻한 고향 같은 포근한 영혼성이 있다. 이러한 귀향점이 암시나 상징으로 나타나며, 단순한 허구가 아닌 일상적 경험과 진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상적 삶의 고통, 슬픔 등이 진실된 목소리로 다가오는 생동감이 있다. 그는 소박한 일상적 삶의 이야기를 시적 긴장미로 압축하여서 가슴 저미는 시로 창작한다. 미국 동부 잉글랜드 농촌 및 자연 속에서 처한 시적 상황을 가장 진솔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혼돈을 제어하는 순간적인 정지”(a momentary stay against confusion)상태를 표현하는 언어행위가 시라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단순한 서정적 감성, 낭만주의적 열정, 회화적인 환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너무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언어적 장식이 없고 고요한 정서와 열정, 영적 부드러움, 인생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과 신비성을 제공해준다. 자연히 그의 시는 읽기 쉬우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잔잔한 음성과 톤이 있다. 삶의 비전을 사실성이 높게 묘사하고, 특정 상황을 살아있는 감정으로 포착해낸다.

         그는 자연과 인생의 숲에서 홀로 관조하는 방랑자, 영적 탐구자이다. 인생의 비극성과 역설적 희극성을 동시에 명상한다. 그의 시적 창조자는 생의 슬픔(긍정적 비극)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동정심, 더 나아가서 무거운 감성을 아이러니로 이해하는 기질이 있다. 이러한 시적 특성이 그의 어두운 시적 유머와 아이러니로 점철된다. 그는 전원적 주제와 소재를 바탕으로 창작하면서도, 생의 원대한 힘, 부정할 수 없는 심원한 존재성을 인식하려 한다. 전원적 낭만성 위로 중첩되는 생의 아픔이 잔잔하게 전달된다. 그의 목가적 아름다움은 단순히 낭만주의적 우아함보다는 무언가 속으로 가라앉는 애환이 스며나온다.

         이러한 시성이 사실주의 시, 아이러니 시, 극적 대화시의 형식성을 갖는다. 그의 시는 드라마 인물이 대화하듯이 담담하게 내용을 전개시키면서, 시적 동기와 감성을 소통시키고 있다. 그 시적 인생관의 부딪힘과 음성이 그림처럼 인생에 대한 묘한 감성을 전달해준다. 이러한 생의 아이러니는 시 “귀향(Home Burial)”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은 혼자라네, 나 홀로 외로이 죽어 가는./ 그대 친구들이 무덤까지 따라갈 듯 말하지만,/ 그대 매장되기도 전에, 그들 마음 돌아서서/ 제 인생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자기 사람을 찾고, 익숙한 대상으로 돌아가며./ 그러나 세상은 사악한 것. 내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리. 오 나는 그리 슬퍼하지 않으리.”

         그의 시를 읽다보면 미묘하게 감정이 고여오는 시적 효과를 느낀다. 시적 화자가 숲 속에서 걸음을 멈추고, 길을 벗어나서 오롯한 외솔길을 걸어가는 사실적 묘사에서도 이상한 영감과 신비한 언어적 예시성을 제공받는다. 이것이 그의 시에서 자주 느껴지는 사실주의적 상상력의 주술이 아닌가 싶다.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서도, 역으로 이상한 숲 속이나 농촌에서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는 이상한 마력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시성이 그의 단순 소박한 시가 제공하는 묘한 시적 번뇌, 갈등이 된다. 이것이 그의 심리주의적 시성, 심리적 묘사력이 되는 듯하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심리주의적 시성은 그의 예술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고요한 시간에 다시 재생시키면서, 응축된 감성을 잔잔히 풀어낸다. 그의 시는  사실주의적 단조로움과 동시에 심리적 긴장감을 준다. 이러한 모순성이 그의 대화시, 산문시, 자유시나 정형시에 유머러스하게 혼재되어 있다. 일례로 그의 극시(劇詩)에서는 미국적 향토성을 진하게 표현한다. 보통 시골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인생의 진실을 말해준다. 농부, 일꾼, 부랑아, 여행자의 삶에 대해 철학적 명상을 즐긴다.

         이러한 평이한 현실적 시성 때문에, 그의 시는 호흡하듯이 시상과 소리, 의미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시행, 절, 시어가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고요한 명상과 의미로 연결된다. 그의 시는 동시대의 Eliot, Pound, Stevens와는 달리, 복잡한 톤이 없고 위트와 무거움이 쉽게 잘 조화되어 있다. 일례로 “나는 농담할 때 가장 심각하다” 표현에서 이러한 모순이 숨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는 언어를 소리 태도로 평가하듯이, 시속의 침묵도 극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 대상물이 침묵하고 대화하듯 한다. 그의 시는 읽으면서 바로 이해되는 면이 많은데, 그 이유는 시적 호흡, 흐름이 쉽게 와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숨쉬듯이 쉽게 보고 듣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인생과 직접 연결된 상상력으로 구체적 의미를 읽어내면 된다.

         이러한 시의 호흡이 소리와 의미를 연계시키는 그의 시론(sound-posturing)이 된다. 이것은 단어 내면에 숨어있는 의미의 소리를 발견하기다. 일상적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 생의 깊은 의미를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불투명한 것을 소리로나마 잡아내려는 것이다. 원래 단어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인위적으로 부여한 단어 의미는 항상 단어의 소리에 지배당한다. 소리의 심리학, 소리가 전달해주는 심리적 반응이 인위적 의미보다 앞선다. 일례로 벽을 사이에 두고 (단어는 구분되지 않지만 목소리는 들리는 정도로) 말을 한다고 해보자. 단어 의미는 모르지만 소리가 잘 들리면, 상대방의 말하는 의미를 충분히 포착할 수 있다. 이것은 특정한 소리가 특정한 의미를 이미 지배하고 있음을 말한다. 곧 소리가 의미를 생성한다. 따라서 시는 소리내어 읽을 때,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시의 소리에서 감정과 사상도 전달된다. 평범한 일상 언어(속담, 격언 등)에서 이러한 언어의 소리 성향이 높기 때문에, 프로스트는 평이한 일상 생활 시를 다작하였다.

         이러한 소리의 문장 표현력은 프로스트의 주요한 시론이므로 좀더 살펴본다. 이는 일반 시 창작에 응용가능성이 높다. 그는 시 의미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에 의존한다. 단어에 태생적으로 깃들어 있는 소리성이 인위적 의미보다 강한 시적 표현력이 된다고 믿는다. 이는 시어의 인토네이션(강약, 고저) 이론과 같은데, 의미가 소리처럼 들리게 하거나 의미의 톤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즉 일상 언어는 단어 의미로만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목소리의 톤이나 소리에 의해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단어 의미와 목소리 톤이 다를 경우에 흔히 아이러니라고 한다. 일례로 단어 상으로는 “잘 한다”고 써도, 말의 톤을 비아냥 거리듯이 말을 하면, 실제 의미가 잘 한다는 뜻이 아니라, 비난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글자보다는 목소리나 톤에 의해 의미 변화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는 이러한 시 목소리를 굴곡시켜서 아이러니를 의도적으로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대화시를 통해서 극적으로 여러 목소리를 표현하려 한다. 이것이 그의 극시의 특성이 된다. 이러한 대화의 목소리 변위, 의미의 톤을 변화시키자면, 자연히 대위법이 이용된다. 하나의 리듬과 톤, 센스를 다른 것과 동시에 대비시킬 때, 상호 차이점에 의해서 시적 감성이 강하게 전달된다. 시적 화자의 다양한 인토네이션에 의해서 시적 긴장감, 감동이 강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자연히 그의 시는 극시, 대화시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소리의 이미지는 원시인들이 언어 발견 이전에 소리로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경지와 비슷하다. 원시언어는 추상적 의미 분화보다는 단순한 소리(의성어, 의태어, 형상어 등)로서 강력한 감정을 충전하고 있다. 이러한 소리글자는 표의문자(漢字)처럼 시의 깊은 맛, 감정의 울림이 되는 시어가 된다. 내적 경험과 그 의미가 소리처럼 들려오는 시의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으면, 그 시는 감동이 높은 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 표현법은 시각성의 효과와 유사하다. 하나의 그림처럼 사물을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면 시적 효과가 높듯이, 시적 표현 대상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이 표현하면 효과가 높아진다. 이러한 성능을 가진 시어는 지성어, 추상어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어, 생활용어, 속담 언어에서 많이 발견된다. 우리가 고대 언어를 읽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언어의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2) 언어를 소리로 듣고 따라 할 수 있을 때, 그 시어의 의미는 자연히 전달된다. 이것은 곧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깊은 생각이 음악처럼 자연스레 형상화될 때, 시 의미의 소리가 물처럼 흘러나온다.

         이러한 단어의 소리성 이외에도, 그의 시는 극시적 요소인 인물, 배경, 이야기 요소를 잘 이용하고 있다. 그는 자연 시인으로서 서정시, 명상시를 쓰고 있는데, 그 시작법이 극적 효과를 겨냥하게 된다. 인간 정신의 최고점은 대체적으로 극화(極化)되고 이분법적으로 제한된다. 이 제한 조건에서도 최고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때에 자연히 자기 한계성의 표현이 아이러니로 탄생된다. 일례로 한글에서 “글쎄요”라는 애매모호한 대답도 어찌 보면 최고의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로스트는 심각한 내용과 동시에 유머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궁극적인 문제해결이나 심원한 최고성 달성이 불가능한데서 나오는 아이러니의 지적 놀이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시 현상은 당시의 모더니스트한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공동 주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 접근하는 시작법을 구사하였다. 그의 시는 신비한 영혼이 깃든 듯한 숲 속에서 눈 내리는 밤과 저녁에 넘지 못할 담장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시성이 강하다. 


    3. 시 감상


     그러면 이러한 프로스트의 시 특성을 바탕으로 그의 시를 몇 개 감상해보자. 시 감상에는 정도가 없다. 프로스트 자신의 말대로, “우리는 링에서 원무를 추면서 추측하지만,/ 비밀은 중심에 앉아서 벌써 알고 있다(We dance round in a ring and suppose,/ But the Secret sits in the middle and knows)”(비밀의 좌선, 전문). 그는 시 해석이란 읽는 자의 즐거움에 따라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1916년에 발간된 시집 <산간>에 수록된 “가지 않은 길"을 감상해본다.


    노랗게 물든 숲 속의 두 갈래 길.

    한 몸의 나그네 두 길 다 갈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한 길에 서서 저 아래

    덤불 속 감돈 한 쪽 길, 저 모롱이너머

    오래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길만큼 아름다운 저 길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이 길이 더 나을 듯 하였습니다.

    이 길은 풀이 더 무성하고 인적이 없어

    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길도 걸으면 모두 같겠지요.



    그 날 아침 두 길은 모두 검은 발자국에

    아직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이 덮여 있었습니다.

    오! 나는 내일을 위해 처음 길을 남겨두었습니다.

    우리네 산길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예감이 드옵니다.


    머언 먼 훗날 우리 모두 어디선가

    고요히 한숨쉬며 이렇게 말하겠죠,

    "어느 숲 속 두 갈래 길, 나는 선택하였네, 

    인적 드문 고요한 이 길을 걸으며

    내 인생은 이리도 변하였나니."


        이 시는 시인이 40세 정도에 쓴 시다. 좌절과 청춘의 흔들림 시기를 벗어나서 불혹의 시기에 접어드는 초기에 시인이 걸어온 인생역정을 회고하듯이 담담한 예지를 보여준다. 인생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갈림길의 연속이다. 고요한 산길의 노란 낙엽 깔린 길이나 도시의 신호등 얽힌 네거리에서나, 인간은 항상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두 가지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설정되는 선택. 모든 선택은 다시 잡고 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간과 인생의 선택은 단 한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한번의 선택으로 계속 연결되는 인생은 돌아갈 구멍이 없다. 새순 치는 나무처럼 매년 위로만 위로만 뻗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열매를 떨어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어지럽기만 하다. 지나온 세월의 자욱이 더욱 아쉬워 돌아갈 수 없는 생의 아픔이 고요히 잠겨온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왼지 아쉬운 생의 여정에 눈물이 그르렁 거린다. 생의 허무함이 허랑허랑 스며든다. 가고 싶은 길을 걸은 인생이나 놓쳐버린 길에 대한 미련을 거는 인생 모두가 살아온 자취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삶은 놓쳐버리기에 더욱 아까운 법. 다시 한번 더 걸어갈 수 없는 길이기에 모두가 섧어한다. 이러한 생의 진리가 고요한 시어로 반복된다. 숲속에서 갈라진 길을 바라보는 시인의 고요한 마음이 낙엽지듯이 한올 한올씩 벗겨진다.

         이 시는 이러한 평범하나 엄연한 진리를 호소하면서도, 철학적 지성이나 종교적 교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산길을 걷는 일상적 경험 속에서 생의 덧없음, 후회와 인생조건, 삶의 내면성을 담담히 그려낸다. 이러한 평범성과 내면성이 프로스트 시의 장점이다. 이 소박성이 정교한 지적 논리로 무장하면, 현상학적 판단중지(epoke)의 경지나 불교의 반야의 경지로 승화될 수 있다. 시인은 담백하게 인생 선택 이면의 무성(無性)과 존재성을 표출하고 있다.

         다음은 이러한 선택의 감성이 더욱 구체화되는 시를 읽어보자. “눈오는 날 숲가에 서서”(1812)는 프로스트의 대표시로 인정될 만큼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전통적 시 형식인 4행시와 각운을 격식있게 사용한다. 이러한 형식적 전통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하루 밤사이에 자동기술법 식으로 창작하였다고 한다.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집은 저 마을에 있네;

    그는 알지 못하리라 여기 나 홀로 서서

    눈 나리는 숲을 바라보는 마음을.


    내 조랑말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농가도 없는 이 곳에 왜 서있는지.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이 저녁에.


    말이 짤랑짤랑 방울을 흔든다

    나의 잘못을 묻기라도 하듯이.

    한가로이 바람 스치는 소리와

    솜털 같이 나리는 눈송이 소리만 들린다.


    숲은 사랑스러운 어둠으로 그윽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수많은 약속이 있다

    내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머나먼 길

    내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머나먼 길.


         이 시는 이중 구조의 메타포를 갖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잠(죽음)의 메타포와 그 내면에 들어있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상호 맞물려 간다. 눈이 쌓여가는 숲 속에서 인생에 대한 가벼운 슬픔과 서정적 평안감, 부드러움과 아픔 등이 상호 교체된다. 눈이 사각사각 내리는 소리와 동시에 괜스레 차오는 우울한 기분, 평화로운 마음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등이 같이 어울린다.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쭈삣함, 눈과 허무의 백색과 흑색,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만감한다. 지난 가을에 수북이 쌓였던 낙엽은 모두 저 깊이 쌓인 눈발아래에 묻혀있고, 지난 계절에 느꼈던 시공(時空) 감각, 삶의 편린이 모두 사라진 듯하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텅 빈 마음! 이것이 숲 속에서 깊어가는 겨울밤의 눈 내리는 모습이리라. 모든 생물이 소멸된 죽음의 공간같이 느껴지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다시 소스락거리며 일어나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다시 일어나서 따뜻한 벽난로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의지, 책임감, 새로운 인생에 대한 욕망 등이 슬픔보다 강하게 일어난다.

         프로스트의 시는 이러한 책임감에서 강한 자연의 치유력을 준다. 숲 속에서 외로운 감상보다는 새로운 삶의 약속을 향해 일어서는 강인한 생의 의지를 배우게 해준다. 인간의 언어와 교훈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무언과 인내, 고적함 속에서 소록소록 가르쳐주는 따스함 교감이 있다. 도시인으로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유와 깊은 숲 속에서 홀로 읍소(泣訴)하는 감정을 제시한다. 이 시가 상실된 도시인의 자연성을 재생시켜 주기에 더욱더 아픔을 공유하게 한다. 이러한 자연의 치유력은 이 시의 생태적 유기성을 반영해준다. 각 연마다 생각이 난로 위에서 녹아내리는 눈덩이처럼 흘러나린다. 소박한 눈 내리는 숲에서 홀로 자연을 바라보는 말 탄 자의 잔잔한 애환. 그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여행자이지만, 어둡고 무서운 인생 매력에 아직도 이끌리고 있다. 숲은 어둡고 깊을수록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준다. 생의 계곡은 눈 내리는 날 지켜보아야만 두려움을 알 수 있다. 드러난 산등성이보다도 더욱 깊게 묻혀있는 저 계곡의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끝으로 자연시가 선시처럼 승화되는 서정성을 느껴보자. 프로스트 시에서는 “불과 얼음”과 같은 간결하면서도 위트와 지혜가 담긴 단시(短詩)가 많다. 이 시들은 선사들의 게송처럼 풍요한 생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위에서 감상한 눈과 연관된 단시 “오래된 눈덩이(A Patch of Old Snow )”를 읽어본다.


    마당 한 구석에 오래된 눈 한덩이

    지난 밤 내린 비에 쉬라고 내려온

    바람에 흩날리던 종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네.


    마치 작은 인쇄를 뿌려

    온통 얼룩 때가 묻은 듯한,

    내가 잊고 있던 어느 날의 소식--

    아! 내가 그대를 읽을 수 있다면.


         프로스트의 정형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작은 일상사를 극세밀화(極細密畵)처럼 감성적 표현하고 있다. 마치 스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냅샷으로 멈춰있는 듯하다. 마당 한구석에 아직 채 녹지 않고 있는 눈조각을 보고서 자연과 문명, 현재와 과거, 순수한 눈과 더러운 때를 상호 대비하는 멋진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지점에서 크게 부각되는 자연과 문명의 명암 대비가 일품이다. 겨울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내려다 볼 때,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눈조각을 보면서 지난 세월의 소식을 새로 발견하는 추억의 아픔이 솟아난다.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신문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가, 따스한 마당 한 구석에 햇살을 쬐며 쪼그리고 앉아있는 세월의 괴물처럼 드러난다. 오전 햇살의 짜릿함에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감수성이 깊이 파고든다.

         프로스트 시는 대체적으로 위에서 보듯이 지난 세월을 환기해주는 추억과 회한이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는 낡은 신문처럼 구겨지고 버려져 있지만, 시인의 의식 속에서 잊혀진 눈덩이처럼 새롭게 태어난다. 잊어버린 세월의 소식을 다시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고요한 희망이 엿보인다. 이러한 욕망은 한 소식을 기다리는 선사의 기다림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일상적 사물 속에서 잊혀지나 떨어지지 않는 세월,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읽어내는 삶의 지혜를 담담하게 전해준다. 검은 먹물이 뿌려져 검뎅이 낀 듯한 세월의 자욱을 다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랴! 이 시는 2연의 단시로서 경귀적이고 배추 고갱이처럼 선시의 풍정을 준다. 그의 시는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와 의미를 중첩시키기에 암시와 상징이 풍부하다.

         프로스트 시는 일견해서 전원시적인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소박한 내용이면에는 인생에 대한 근본 진리가 스며 나온다. 일상적인 농촌 사건을 이용하여서 심원한 생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단순한 전원시를 넘어서 내면적 삶에 고민하는 시성이 많다. 이것이 생의 혼돈에 대해 잠시 정지하듯이 명상하는 시성이다. 이러한 시성이 불과 얼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자연과 영혼의 이원적 가치가 항상 대립되듯이 시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의 자연성은 이러한 대립의 극복, 모순의 조화 속에서 매우 신비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불에서 태어나는 욕망과 얼음에서 태어나는 차가움과 감정의 사라짐이 조화되어서 새로운 감성과 인간성을 창출한다. 이러한 두 모순이 하나로 통일됨으로서 그의 시적 아름다움이 강화된다. 그의 시는 눈내리는 밤에 숲가에 서서 생의 신비를 응시하는 촌부의 지성이 있으며, 화창한 햇살아래서 들판의 담장 위에 걸터 앉아 계절과 세월을 관조하는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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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stevenshan, 함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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