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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1972 1집 YOUNG FESTIVAL VOL.1 친구여
TRACK
A01 친구여
A02 내 마음을 채워주오
A03 그 여인 그 표정
A04 아빠의 자장가
A05 안녕
B01 그대여 속삭여줘요
B02 그애와 나랑은
B03 무지개
B04 아무도 모르는 집
B05 밤 바람 마음
이장희 1972 2집 YOUNG FESTIVAL VOL.4 헝클어진 내머리
TRACK
A01 헝클어진 내 머리
A02 애인
A03 마지막 노래
A04 비의 나그네
A05 내사랑 제인 (Lady Jane)
B01 꿈 이야기
B02 겨울 이야기
B03 그대여 눈을 감아요
이장희 1973 그건 너
TRACK
A01 그건 너
A02 촛불을 켜세요
A03 그애와 나랑은
A04 당신은 누군가요
A05 친구여
B01 누구일까
B02 자정이 훨씬 넘었네
B03 애인
B04 비의 나그네
이장희 - 그건 너
이장희 - 촛불을 켜세요
이장희 - 그애와 나랑은
이장희 - 당신은 누군가요
이장희 - 누구일까
이장희 - 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장희 - 애인
이장희 - 비의 나그네
이장희 1975 나야 나
이장희 1975 나야 나
TRACK
A01 나야 나.mp3
A02 아가씨는 어려요A03 오늘밤 웬일인지
A04 그애와 나랑은
A05 겨울 이야기
B01 창가에 홀로 앉아
B02 당신을 처음 본 순간
B03 촛불을 켜세요
B04 그여인 그표정
B05 무지개
이장희 - 그애와 나랑은
이장희 - 겨울이야기
이장희 - 창가에 홀로 앉아
이장희 - 촛불을 켜세요
이장희 197X 골든베스트 16(카피음반)
TRACK
A01 그건 너
A02 그애와 나랑은
A03 자정이 훨씬 넘었네
A04 애인
A05 그 여인 그 표정
A06 비의 나그네
A07 무지개
A08 겨울 이야기
B01 한잔의 추억
B02 창가에 홀로 앉아
B03 나야 나
B04 오늘밤에 웬일인지
B05 편지
B06 당신을 처음 본 순간
B07 아가씨는 어려요
B08 바닷가 언덕
이장희 - 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장희 - 편지
이장희 1980 자정이 훨씬 넘었네
TRACK
A01 자정이 훨씬 넘었네
A02 그애와 나랑은
A03 그여인 그표정
A04 무지개
A05 비의 나그네
A06 촛불을 켜세요
B01 슬픔이여 안녕
B02 바닷가 언덕
B03 나야 나
B04 편지
B05 오늘밤 웬일인지
B06 국민 응원가 (건전가요)
이장희 1982 진정 사랑해
이장희 1982 진정 사랑해
TRACK
A01 진정 사랑해
A02 Can Love
A03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A04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때
B01 캘리포니아의 밤
이장희 B02 안녕
B03 얘기할 수 없어요
B04 한동안 뜸 했었지
이장희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이장희 -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때
이장희 - 한동안 뜸했었지 (노래 사랑과 평화)
"공부가 지겹던 수험생 시절 한밤에 라디오를 틀면 늘 거기 그가 있었다. 'In the year of 2525'라는 시그널 음악으로 시작되던 그 프로그램을 잊을 수 없다." 주철환(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은 이장희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 프로그램은 1973년 새해 첫날부터 맡기 시작한 '0시의 다이얼'이다. 이장희는 이 해 '그건 너'를 발표하여 당시 가요계를 휩쓴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이장희가 당시 사랑에 빠졌던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에게 바친 곡이었다. 그건 너 때문이라고 외치던 이 노래는 나중에 금지곡이 되는데 그 이유는 남에게 책임을 왜 전가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동네 창고 근처 너른마당서 펼쳐진 노래자랑에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이 노래를 '들고'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목이 터져라 '그건 너 바로 너'를 외친 것 같은데, 의욕만큼 노래가 잘 나오지는 않았는지 보기 좋게 낙선했다.
도발적인 빨간 재킷에 콧수염, 담뱃대를 입에 문 사내. 1972년 이장희에 데뷔 앨범 "영 페스티벌 vol1. 그애와 나랑은'에는 이유없는 반항과 삐딱한 청춘의 우수가 깃들어 있다. 내 기억은 그 뒤에 '아싸 호랑나비'로 사람들을 웃겼던 가수축구선수 김흥국의 콧수염과 이장희의 그것을 버무려 버렸지만, 그래도 그 콧수염 사이로 나른하게 터져나오던 '그애와 나랑은'이나 '자정이 훨씬 넘었네'를 잊지 못한다. 당시로선 '아주 시건방진' 콧수염과 나른한 음색은 권태와 퇴폐를 전염시켜, 이제 막 사춘기였던 내 가슴에 불온한 반항끼의 원형을 심었다.
조영남, 그는 이장희의 삼촌 친구였다. 당시 서울중학교 2학년이었던 이장희는 집에 놀러온 키 작은 고등학생이 툇마루에 앉아 기타를 치는 걸 보고 '졸도할 것 같았다'고 말한다. 팝송을 부르며 기타를 치는 조영남의 모습은, 어린 이장희의 눈에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 운명의 만남은 이장희를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사북'이었다. 그러나 조영남은 이장희를 음치라고 놀린다. 그의 노래는 음악성보다 분위기나 어떤 기분으로 들어야 맛이 난다. 그는 어쩌면 노래 부르는 가수 기질보다 중얼거리는 음유시인의 기색을 지녔고 아우성치는 '오토바이 폭주족'의 기질을 더 많이 지녔는지도 모른다.
이장희가 서울고 연세대라는 학력을 내밀 수 있게 된 건, 성실한 학구열 덕분이 아니라 네살 때 천자문을 배웠다는 그의 천재'끼' 때문이라고 봐야 하리라. 그는 중3때 그리고 고3때 벼락공부를 했던 기억을 얘기한다. 진학을 못하게 된 아들에 대해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를 보고는, 오기가 생겨서 한달 만에 해치운 '공부'가 그를 고등학교에, 그리고 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렇지만 취미와는 상관없이 입학한 생물학과가 그에게 재미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는 고교 시절 싸움에 휘말려들어 왼쪽 눈의 망막이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날마다 현미경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신 그는 해리 벨러폰테와 행크 윌리엄스의 노래에 미쳐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음악다방 '쎄시봉'에 출입한다. 거기엔 명사회자 이상벽(당시 홍대생)이 있었다. 쎄시봉에 출입하는 당시 멤버들은 화려했다. 신중현, 송창식, 서유석, 김민기, 김세환, 김도향, 조영남...이장희는 거기서 그들과 놀았다.
"이상하잖아, 노래가?"
이장희가 밤무대에 데뷔할 무렵, 업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노래 부르는 스타일이 좀 낯설었던 까닭이리라.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불합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때 김세환과 윤형주, 그리고 송창식이 업소 주인에게 호소를 한다.
"무슨 소립니까. 저게 얼마나 잘 부르는 노랜데...저 친구 안쓰면 우리도 여기서 노래 안부를 겁니다."
이런 지원사격으로 이장희는 '가수'로서 피어날 수 있었다. 인기 DJ 이종환의 권유로 처음 앨범을 냈던 건 1971년이었다. '겨울 이야기'란 타이틀의 앨범에는 2년 동안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가 실려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래들이 저절로 '발'을 달고 가슴과 머리에서 걸어나왔단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트윈폴리오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번안가요였었다. 이장희의 자작곡들이 가요계에 주목을 끌게 된 건 2집'그애와 나랑은'을 냈을 때(1972년)였다.
가수로, DJ로, 명성을 쌓아가던 1974년 이장희는 결혼을 한다. 아내는 방직회사 사장의 딸이었다. 그런데 신혼의 단꿈을 깨기도 전에 두 차례의 된서리를 맞는다. 1975년이었다. 그해 여름 정부는 가요 정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히트하고 있던 노래들을 대대적으로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 그의 노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불꺼진 창' 등이 모두 그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졸지에 그는 '입'이 봉해진 가수가 되어 버렸다. 그해 겨울엔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인기 연예인 80여명이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었다. 그는 윤형주, 이종용 등과 함께 겨울 감방 속으로 들어갔다. 연행된지 20여일 만에 그는 풀려났다.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는데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고요히 나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한국 제일의 스타라는 자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큰 사건이 터졌으니 음악활동도 쉽지 않을테고 그런 상황에서 한쪽만 바라보며 한숨 짓는 건 할 짓이 못된다고 봤어요.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딴 일을 하자."
그의 감옥생활은 가수라는 직업을 사표내게 한 계기였다. 1976년에 그는 종로구 서린동에 반도패션 종로지점을 운영한다. 판매원 숫자가 20여명을 헤아릴 만큼 큰 매장이었다. 한 동안 사업에 열을 올렸으나, 일이 잘 풀리니, 다시 가수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작곡과 음반제작을 시작한다. 1978년에 그의 손에서 록그룹 '사랑과 평화'가 탄생한다. 김수철, 김현식도 그가 발굴한 가수였다. 이런 '남모르는' 성공을 거두고 있을 무렵, 옷장사는 그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 1980년에 제주도와 마라도에 갔다가 거기서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거기 땅을 사서 무공해 채소를 키워 서울의 부자들에게 직접 팔겠다는 야심이었다. 일단 성산포 앞의 농토를 조금 사놓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그해 광주에서 피의 진압이 시작된 때였다.
이장희는 80년 가을 캐나다에 갈 일이 생겼다.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몬트리올서 열리는 태평양가요제에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수 김태화와 작곡가 김도향, 그리고 음반제작자인 이장희가 함께 갔다. 셋은 내친 김에 미국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서 최인호를 만난 것이다. 최인호와 이장희는 거기서 미국 대장정을 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이장희가 중고차를 사고, 최인호는 가스 값을 대기로 한다. LA를 출발, 캘리포니아주를 지나,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년, 유타주의 브라이스 캐년, 모뉴먼트 밸리, 그리고 세인트 조지, 허리케인, 네바瑁聆?라스베이거스로 내달렸다. 광막한 미국 서부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거대한 에너지로 달려들었다. 그 여행 이후 이장희는 미국에 살 결심을 굳혔고, 최인호는 그 감동을 익히고 다듬어 단편 소설 '깊고 푸른 밤'을 썼다. 이 작품은 1982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배창호 감독은 1985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크게 히트시켰다.
뒤늦게 소설을 읽은 이장희는 최인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소설 속에는 한국에서 대마초 파동에 휘말렸다가 미국 여행길에 오른 가수가 나온다. 물론 그가 이장희다. 그런데 이장희가 화가 난 건, 자신이 형편없는 인생 실패자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최인호의 말. "임마, 악당이라도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됐으면 영광이지 뭘 그래?" 농담 섞인 핀잔에도 이장희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최인호는 슬며시 사과를 했다고 한다.
미국서 여행과 방황을 9년을 보낸 뒤 그는 우연히 LA한국일보를 방문했다가 미디어 사업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라디오코리아는 그래서 탄생한다. 이 작은 방송국에 대한 교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1992년 LA폭동 때 라디오코리아는 상황실.대피소.자위대 본부 구실을 하기도 했으며 부시 전 대통령과 교민대표의 협상 장소로도 쓰이었다. 이장희는 이 업체 외에도 스포츠서울USA와 옐로페이지 사업을 하는 인포코리아를 갖고 있었다. 이장희는 LA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더 유명해졌다. 그가 한국에 오면 조영남,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동진, 이상벽, 최인호가 모두 모였다.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닦고 종종 우울에 빠지는, 옛날 가수 이장희다. 몇년 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울릉도에서 낙원을 스스로 지어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영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 가수에 대한 추억 긷기를 마칠까 한다.
"한번은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 패거리들과 함께 시인 김남조 선생 댁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장희가 우리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들었어요. 김남조 시인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그 친구가 선생의 장시 한편을 좔좔좔 읊어나간 거예요.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지요."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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