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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철 - 어느 늦은 저녁의 수증기시(詩)/시(詩) 2021. 9. 6. 10:40
흰 종이 한 장 가득 당신의 이름을 적어 푸른 강물에 넣어줍니다. 당신의 이름 사이로 송사리 입술들이 오물거리며 지나갔을, 잉크가 퍼져 당신의 이름이 강물에 스며들어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푸른 잉크가 강물에 젖기 시작 하는 시간이 있지도 않았을 때의 젖음을
먼 훗날 바다로 흘러들어가 소금의 무게를 이겨낸 수증기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물에 젖었던 당신의 이름이 나비처럼 날아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그 글자의 주인(主人)을 찾아가게 될, 그 먼 어느 날의 조우(遭遇)에 대해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 먼 그리움으로 외로워지는 어느 저녁의 마음은 꼭 흰 종이 위의 당신 이름 같아서,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도 없는 텅 빔으로 당신을 기다릴 때, 시간이 있기 이전의 사이로 푸른 송사리들이 지느러미를 마구 흔들어대는데,
흰 종이 한 장 가득 당신의 이름을 적어 강에 넣어두면 인연이 닿는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내가 없는 시간의 이후에도 지상에 혼자 남아 밤물결 위에 내 이름을 적어볼 당신의 슬픔까지, 내 그리움에 포함시켜보는 겁니다. 그 푸른 열애(熱愛)에 대해
(그림 : 김혜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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