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숙경 - 살구나무 옆 자귀꽃시(詩)/시(詩) 2021. 8. 19. 09:27
분홍 꽃잎을 열면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꽃잎을 닫으면 당신의 목소리는 사라지죠
색깔이란 그런 거예요
빨강은 빨강의 방식대로
분홍은 분홍의 방식대로
빨강이라 생각하면 빨강이 되고
분홍이라 생각하면 분홍이 되는 거죠
어제 분홍을 물고 날아간 새가 오늘은 돌아올까요
떠난 바람이 분홍 깃을 꽂고 돌아온 것처럼요
어쩌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누군가 말하겠지만
날개 있는 것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날개를 숨겨두었죠
다음 생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뒤꼍 살구나무에 기대어 눈 감고 열까지 세고 나면
대숲에 알 낳은 암탉의 울음 외에는 온통 텅 빈 세상
그 아련했던 적막이 떠올라요
오! 흐르지도 젖어들지도 못하는 나는 어쩌죠
그래도 괜찮아요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왔으니까요
살구나무 옆에 자귀꽃 피었으니까요
분홍 꽃술을 만지는 살가운 바람의 손길 있으니까요
(그림 : 주민숙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성용 - 흐린 저녁의 말들 (0) 2021.08.19 임경섭 -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0) 2021.08.19 김남이 - 사과의 눈물 (0) 2021.08.19 김해화 - 새로움에 대하여 (0) 2021.08.15 윤재철 - 생각은 새와 같아서 (0) 2021.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