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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전야(前夜)시(詩)/안도현 2018. 8. 6. 11:25
늦게 입대하는 친구와 둘러앉아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소주잔에 고인 정든 시간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겨울밤
창 밖에는 희끗희끗
삐라 같은 첫눈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남들이 스물 갓 넘어 부르던 군가를
꽃피는 서른이 다 되어 불러야 할 친구여,
식탁 가득 주둔중인 접시들이 입 모아
최후의 만찬이 아니야 아니야
그래, 때가 되면 떠나는 것
까짓 것 누구나 때가 되면
소주를 마시며 모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려도
버려도 끝까지 우리 몸에 남는 것은
밥과 의무, 흉터들
제각기 숨가빴던 시절들을 등뒤로 감추고
입술 쓴 소주잔을 주거니받거니 돌리노라면
옷소매 밑에 드러나는 부끄러운 흰 손목이여,
얼마나 많은 치욕이 우리의 두 손목을 적시며 흘러갔는지
늦은 친구가 머리를 깍으러 간 동안
주인공 없는 슬픈 영화장면 속에서
우리는 노래 불렀다
학기도 노래 부르고 종남이도 부르고
감출 수 없는 흥분만 고요히 이마에 서리고
우리는 더욱 쓸쓸해서
거푸 술잔을 비운다
이 밤, 젊고 그리운 서러움은 비로소
온 사방 함박눈으로 내려 쌓이고
별리(別離)의 흐린 담배 연기 속으로 돌아와
내일이면 병정이 되기 위하여
말없이 뒷모습 보여줄 친구여,
어느 시대의 은빛 투구를 씌워줄까
두터운 방패를 쥐어줄까
우리는 목구멍에다 눈물 같은 소주를 털어넣는다(그림 : 이상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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