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박수원 - 빨래의 자격

누렁이 황소 2023. 8. 2. 18:51

 

이 지독한 결벽증 환자는 검어지는 하늘도 씻으려 대든다

늘 젖어 있어야 마를 수도 있어

씻고 또 씻다 보면 주절주절 열린 눈물 맛을 맛볼 수가 있다

 

그것이 자격이다,

 

거품은 거품과 어울리고 물은 물과 어울려

싫어도 서로를 껴안으며

흰옷은 더욱 흰옷으로, 검은 옷은 더욱 검은 옷으로

때 묻은 과거를 일깨워 물에 젖으며 빛나게 한다

너는 나를 위하여 나는 너를 위하여

 

 보송한 살갗만 원하는 너를 위해서 난 기어코 만신창이가 된다

거품을 물고 몸을 비비고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마지막 물구나무서기를 할 땐 참혹한 나의 깨달음이다

 

그것도 자격이다,

 

너를 위해서 거꾸로 보는 세상도 바로 보는 세상도

모두가 해 뜨고 바람 불고 비가 내리는 곳,

역류하던 피가

머리에 고일 즈음 그때서야 뜨거운 분노를 말릴 줄도 안다면

 

그것도 살아가는 자격이다

(그림 : 우창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