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창수 - 능소화

누렁이 황소 2023. 6. 19. 13:18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담을 넘었다

그녀는 담 넘어 온 나를 보고

큰소리로 웃으며 쪽문을 가리켰다

담을 넘은 용기는 간 데 없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문으로 도망 나왔다

그럴 거면 왜 담을 넘었느냐며

친구들이 놀려댔다

그 이후 아무리 낮은 담이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어 골목으로 흘러나오는

맑은 웃음소리가

젖은 이마를 씻겨주는 저녁

아주 오래 전 내가 넘었던 담벼락에

핀 예쁜 꽃이 보였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저 문으로 들어오라고

쪽문을 가리켰던 긴 손가락이

오랜 미련을 흔드는 저녁이었다

(그림 : 예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