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상미

김상미 - 보리밭

누렁이 황소 2023. 3. 31. 07:01

 

보리밭 밟은 지 오래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넘어

대지에 잠복해 있다 떠오르는 것 같던 보리밭

한참을 따라가던

 

그때가 언제였나

 

즐거움, 즐거움을 눈 속에 모으며

모든 의미가

철없는 사명감이었던 어린 시절

 

그때의 우리 몸엔 창문들이 많았다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처럼

몸 구석구석에서 창문들이 소리 내며 열렸다

 

그때가 언제였나

 

사방에 적을 두고

친구여,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기껏해야 합리의 소용돌이,

몇 순간 후면 사라질 것들뿐이지만

 

필필필필

보리피리 불며

찰랑찰랑 넘쳐나는 미래에

억척같던 가난도, 궁색한 땀내도

좀체로 질리지 않던

그때 그 시절

 

다시 한번 돌아가볼 수 있다면

 

이 한밤 내리는 눈으로든

비로든 이슬로든

흙투성이 보리밭

그때처럼 밟아보고 싶다

 

그때가 언제였나

아득한 보리밭

(그림 : 박준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