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송호진 - 청국장

누렁이 황소 2023. 3. 25. 12:35

 

울 할매, 시골장터 책방에 들러 사온

전과지도서 내게 건네시면서

얘야, 오늘 말이다

이 책장(冊張) 위로 가게

심장처럼 품에 안고

십리 길 걸어 왔단다 안 그러면,

책속에 잠자던 말들 저 아래로 다 새어

개울물 가재 밥이 되어

배고픈 우리 새끼 어쩌라고

 

당신 넓적다리 내 까까머리 베개로 내주시고

구운몽 장화홍련 홍길동전 병풍처럼 둘러치고

전과지도서에 담긴 그들의 명사며 동사며 토씨를

재미나게 차례차례 불러내

내 가슴 배불렀고 내 머리 감겼다

 

울 할매, 군불에 따끈한 아랫목 청국장처럼

구수한 이야기 들려주기 위해 이들 영상들을

당신이 사온 전과지도서에 담가 두신 것이다

나는 시 쓰는 세간 살림들을 울 할매처럼

내 가슴 내 머리에 빼곡히 새겨두었다가

막상 시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모두가 개울물 가재 밥이 되고 만다

 

아 나는 울 할매가 구운몽 장화홍련 홍길동전을

불러내 술술 이야기하듯 내 이야기 언제 쓰려나

아니 버리고 담그고 버리고 또 담그지

모두가 개울물 가재 밥이 된 텅 빈 책속에

내 밀화(密畫)를 발효시켜

숙성한 청국장처럼 냄새나는

할머니, 나는 보고 싶다

책장 한 장 한 장이 울 할매 그림자로

이 세상 곳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그림 : 윤문영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