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탁번

오탁번 - 밤눈

누렁이 황소 2023. 1. 16. 18:04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인가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쏟아지는 밤눈을 보는데

눈송이 송이 사이로

언뜻 언뜻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달려가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밤눈이

할머니의 빛바랜 자서전인 양

책 묶은 노끈도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지난 이야기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섣달그믐 한밤중

할머니의 눈과 귀

점점 밝아지네

(그림 : 김영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