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구미정 - 이력서

누렁이 황소 2022. 10. 22. 17:46

 

나를 사가세요

성실함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거짓말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남의 것 욕심내지 않았으며

무단횡단 한 번 하지 않았어요

 

계단을 오를 때는 왼쪽으로 올랐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오른쪽으로 가라 해서

발걸음이 먼저 찾아가는 왼쪽방향을

신경 써서 고쳐 오르기도 했어요

 

경로 우대석은 늘 비워두어야 했기에

현기증에 몸 가누기 힘들어도

늘어진 손잡이 꼭 부여잡고 서 있었고

연말에 이웃돕기 성금도 꼬박꼬박 냈어요

 

아이 둘 낳아 건강히 키우며

명절 때 제사 때마다

직장 다니느라 바쁜 사람들 위해

장보고 음식 장만하며 기쁘게 살았답니다

 

더 이상 기대지 말고 자신을 찾으라 해서

이력서 꺼내놓고 한 줄 적었습니다

 

1984년 **상업고등학교 졸업

 

기억도 가물가물한 결혼 전 직장을 적어야 하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학생 때 자격증도 찾아야 하나?

 

이력서의 여백이 온몸으로 번지며

단 한 줄에 갇힌 내 인생이

떨이로 내어놓은 시든 야채 같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