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최지온 - 수국의 시간

누렁이 황소 2022. 10. 12. 12:51

 

지금 그것은 수국 같습니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깊이 스며든 게 눈물인 걸 알았겠습니까

 

한창 피는 중입니다 뿌리는 은밀해질 테지요

수국은 울지 않았습니다

같은 실루엣으로 하얗다가 파랗다가 빨갛다가

 

수국이 수국을 죽이고 수국이 수국을 살리는 중입니다

우리는 덩달아 풍성해집니다

 

수국이 우리를 움직이고

눈멀게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끝날 것 같은 기분에 빠집니다

 

해칠 의도가 있겠습니까

눈물을 좋아할 뿐 더 아름다워지고 싶을 뿐

누군가의 죽음을 원했겠습니까

 

평화로운 세상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우리는 다짐 같은 걸 합니다

잠꼬대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어서

 

버둥거리는 벌레들과 가늘어 가는 줄기를 붙잡고

지금 수국은 수국 아닌 것과 반목하는 중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

 

수국은 수국만을 볼 겁니다 나 없이도 가득할 거 같습니다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이곳에서

우리는 좀 더 놀라워해야 합니다 답 없는 문제는 잠시 상상에 맡기고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지금 나는 수국이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림 : 김한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