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정끝별 - 꽃 피는 시간

누렁이 황소 2022. 9. 6. 21:07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꼬르륵 제 딴의 한소끔 밥꽃을

백기처럼 들어 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 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마저 갈 수 있겠다

(그림 : 고찬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