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근

류근 - 고달픈 이데올로기

누렁이 황소 2022. 8. 29. 15:24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로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따라 걸어야 했지요

처음부터 다리가 걷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머리가 가자는 대로 가다가

더 이상은 걸을 수 없다고 머리가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다리는 그래서 걷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구부린 채 머리의 다음 생각을 기다렸습니다

 

  다리는 머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꿈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플 때 제 아픔을 아파하고 제가 더러워졌을 때 제 더러움을 더러워 할 뿐이지요

머리가 아플 때 제 다리가 아프지 않고 머리가 세상의 일로 더러워졌을 때 제 다리 하나도 더럽지 않습니다

머리가 없어므로 다리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프면 머리가 먼저 그 아픔 때문에 아프고 가 더러워지면 머리가 먼저 제 더러움에 소스라친다는 것

 

 오늘은 오래 걸었습니다 머리가 걷기를 원했으므로 머리를 가지지 못한 다리는 하는 수 없이

온종일 머리를 얹고 멀리멀리 걸어야 했습니다

(그림 : 방정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