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정모 - 풀의 집

누렁이 황소 2022. 8. 23. 10:12

 

사람 떠난 집은 폐가라 하지만

풀이 사라진 자리는 폐허라 하지 않는다

 

떠난 걸 눈치챈 적요만 나앉아서

바람을 믿고 기다리니

등불 없어도 풀씨는 돌아올 것이고

 

집은 아무것도 아니다

햇볕만 울타리로 세워놓고

마음 풀어 바람의 관통을 보는 저, 유순함

 

새소리가 지킨 것은 허공이지만

누워서 무게를 나누고

부드러움으로 아픔을 풀어가는 울음 없는 집

 

귀 없어도 듣고 있는지

보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떠나지만

 

환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년에는 허공의 손을 잡고 새 목숨을 키울 것이다

 

시도해 볼 무엇 하나 자라지 못하는 곳은

집이 아니다

(그림 : 최광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