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박신규 - 화양연화

누렁이 황소 2022. 8. 19. 20:31

 

바람이 불었다, 한겨울

철물점 천막처럼 반쯤 몸을 벗은 채

차갑게 울었다, 죽을 것처럼

상처를 주고받아도

우리는 미치지 않았고 사는 것처럼

살아남지도 못했다, 자고 나면

스무살 앳된 죽음마저도

함부로 버림받았다

뜨거운 문장을 뿌리고 꽃병을 잘 만들어도

우리가 하면 쓸모가 없어졌고

세상은 점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눈멀고 버림받는 것도 식상해졌으므로

각자 숨어서 학대해온 슬픔들을 꺼내

밤새 함께 울다가 실컷 지치곤 했다

새파랗게 젊은 게 지겹다는 몇몇은

옥상에서 유성이 되거나 모터싸이클로 날아갔다

봄날도 연화도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사정하고,

와서는 가지 말라고 발악해도

'이 시간도 다 늙는다'는 걸

모르는 척 모두가 애를 썼다

모든 무정이 유정이 될 때까지

유정이 다시 무정이 될 때까지 ​

타오르고 꺼뜨려버려도 광원처럼 또 바람이 불었다

한번도 펼치지 않은 소란한 시집처럼

구석에 박혀 먼지만 두꺼워지던 시절,

꿈결엔 듯 지나친 것들은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연애조차 우리가 하면 이미 철 지난 것이거나

금세 철이 지나갔다, 애쓰지 않아도

기억은 자꾸 끊기다가 망가졌다

(그림 : 최진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