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심보선 - 나날들

누렁이 황소 2022. 7. 30. 21:54

 

우리는 초대장 없이 같은 숲에 모여들었다

봄에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옮겨 심어 시절의 문란을 풍미했고

여름에는 말과 과실을 바꿔 침묵이 동그랗게 잘 여물도록 했다

가을에는 최선을 다해 혼기(婚期)로부터 달아났으며

겨울에는 인간의 발자국 아닌 것들이 난수표처럼 찍힌 눈밭을 헤맸다

밤마다 각자의 사타구니에서 갓 구운 달빛을 꺼내 자랑하던 우리

다시는 볼 수 없을 처녀 총각으로 헤어진 우리

세월은 흐르고엽서 속 글자 수는 줄어들고불운과 행운의 차이는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지친 노새처럼 노변에 앉아 쉬고 있다

청춘을 제외한 나머지 생에 대해 우리는 너무 불충실하였다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그림 : 이기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