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김금용 - 보름달

누렁이 황소 2022. 5. 16. 21:39

 

보름달이 뜨면 허리가 시리다는 건 옛말이다

밤 조경이 화려한 도시에선

보름달은 도통 할 일 없는 건달일 뿐

서울역 터미널을 전전하는 실직자일 뿐

이태백 흉내 내는 고주망태에게 다가가

소주잔 바닥에 새겨진 광고 얼굴인 양

잠깐씩 떠오르는 옛 애인인 양

윙크하다 머쓱해서 서둘러 떠날 뿐

대낮이나 밤이나 재고창고에 박힌

21세기 보름달은

바겐세일을 붙여놓아도 사가는 사람이 없다

찾는 전화 한 통 없는 방을 온종일 지키는

내 어깨나 치며 흐린 낯빛으로 불러세울 뿐

새로운 센세이션이나 이벤트도 없이

근엄한 명언이나 조언 한 말씀도 없이

한 달에 한 번 얼굴 삐죽 내밀며

멋쩍게 큰기침 한 번 다녀가는 보름달

시집간 딸내미 그리워 아파트 창문 아래

서성이다 가는 친정아버지 흉내를 낸다

돌풍과 황사 덕분에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청매화에 목련이나 일없이 흔들어 놓고 간다

속정 건드려 놓고

허리 시큰하게 툭 발길질 하고 간다

(그림 : 조몽룡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