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심재휘 - 가을 기차

누렁이 황소 2022. 5. 5. 21:05

 

  가을은 오고 기차는 갑니다 우리가 때로 작은 역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가을 기차가 멀리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기차표에 적힌 대로 역방향이고요 미래를 등지고 앉아버린 이 자리는 지나간 것들만 볼 수 있는 자세입니다 다가오는 풍경은 마주 앉은 이의 다정한 눈동자에만 있습니다 어느 역에서 그 사람 나를 두고 내린다면 나는 미래를 잃고 가을 기차는 멀리 갈 뿐입니다

  잠시 정차한 작은 역에서 몇은 내리고 몇은 탑니다 철길 너머 반쯤 무너진 돌집이 햇살에 조금 더 무너집니다 참나무 숲 속에는 간혹 쓰러진 떡갈나무가 있고 막 내렸는지 벤치에 앉아 기차를 바라보는 한 여자를 두고 이내 기차는 떠납니다 사라지도록 먼 곳으로 멀리 갈 뿐입니다 가다 보면 기차에서 내려 며칠 묵을 만한 마을이 어딘가에 있을 법도 한데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나의 자세는 종착까지 역방향의 자리입니다

(그림 : 김태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