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시영 - 시자 누나
누렁이 황소
2022. 4. 1. 16:32
전주시 우이동 살 때 김 순경 집 딸 시자 누나.
새벽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고개를 갸웃하고 우리 집 우물에 긴 두레박줄 내려 물 길어갔지.
첫서리 내린 인후동 고개 넘어 잰걸음으로 학교 갈 때도
역시 고개를 갸웃하고 무거운 책가방 들고 걷던 전주여고생.
3년 동안 이웃에 살면서도 단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나는 눈 감고도 누나가 지금쯤 어디를 지나는지 훤히 알 수 있었지.
장작 짐 실은 말들이 더운 김 내뿜으며 시내로 향하던 길, 도마다리 성황당 고개 넘어 철둑길,
그리고 병무청 사거리 지나 풍남동.
그러나 누나에게 딱 어울린 길은 밭둑에 자운영 자욱하던 인후동 들머리 언덕길.
꼭 그맘때면 '고등국어 1'과 도시락을 실은 국어 선생님이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담도 울도 없는 마당에서 빨래하고 밥 짓는 연기 피워올리던 누나.
덩치 큰 아버지가 술 냄새 풍기며 간혹 집안을 들었다 놓는 날이면
어린 동생을 안고 돌아서서 하늘만 보던 하이얀 이마.
이튿날 새벽이면 양철 두레박 떨어뜨리며 말없이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끙 하고 시원한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곤 했다.
딱 한번 하굣길에서 만났던 곳이 시내가 끝나는 과수원집 좁은 논둑길.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향긋한 머릿내였던가. 순간 시자 누나가 내 몸에 엎어지며 풍기던 뜨겁고 알싸한 그 내음새는.
(그림 : 한영수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