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병률

이병률 - 실

누렁이 황소 2022. 1. 7. 18:27

 

한 사내가 실을 들고 지나갔다

한 손에 든 실뭉치에서 실을 살살 풀면서

어딘가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끝에다 실을 묶어둔 것인지

어디부터 걸어온 것인지

실은 한 방향으로 길게 길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실을 밟기도

실에 감기기도 했다

 

어느 길 중간에서 실에 걸린 사람들은

그 실을 끊으려고도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끊어지지 않았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실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가 싶어

눈으로 실을 따라가보는데

저멀리로 커다란 연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인생에 실 하나를 묶어둔다면

인생 어느 귀퉁이에다 실을 묶어두고

어딘가로 어딘가로 마냥 길을 잃어도 되는 거라면

(그림 : 강정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