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석류정 - 내겐 간이역이 없다

누렁이 황소 2022. 1. 5. 13:29

 

간이역 한 두 개쯤 가진 삶이라면 좋겠다

잠시 머문다고 달라질 게 없고

그냥 지나친다고 비난 받지 않고

 

역전 지하 다방처럼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

가을을 피할 수 있는

지붕낮은 작은 역사 하나

 

홑창 너머 칸나는 눈치 없이 붉게 웃고

프라타너스 노쇠한 이파리

툭, 가슴 치고 내려 앉는데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생각 위로

이내처럼 가물거리던 문간방에선

아버지 기침 앓았고

그 때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살점이 빠져나간 문틈으로

뼈만 남은 바람이

휭,

하며 들어와

가을 너머 가을에 주저앉은

낯익은 우울을 부축이는데

 

다시 종착역까지 갈 땐 가더라도

간이역 먼지 앉은 나무의자에 앉아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고 싶다

(그림 : 김태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