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김지민 - 현장으로부터

누렁이 황소 2022. 1. 5. 13:26

 

가벽 너머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따금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거나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 그러나 가벽은 잘 서 있고

 

가벽을 따라 걷는다

 

사시사철 울창한 녹음과 픽셀이 깨진 석양과 때가 탄 바다와 공중에서 한없이 유예되는 폭포가

가벽을 따라 나란히 인쇄되어 있다

 

임시적인 풍경을 따라 걷는다

 

참새는 가벽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가까운 나뭇가지로 훌쩍 내려앉는다

현장이 파헤쳐지는 동안에도

가벽은 높고 잠잠해

나는 마음껏 생각에 잠길 수 있고

 

현장으로부터 가려진다

 

가벽을 따라 현수막과 가로수의 치밀한 그림자가 되풀이되고

어제와 오늘 사이의 접힌 자국을 발견하고

실감 없이 살아 있다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거나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

 

가벽 위로 솟아 있는 타워 크레인이 천천히 선회하고

가벽 위에 난 문이 열리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인부가 걸어 나온다

 

그 곁을 지나는 나는

잘 닦여 있다

(그림 : 박성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