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최지안 - 왕년

누렁이 황소 2021. 12. 7. 21:24

 

소줏병들이 얼근해졌어요

일렬로 세운 그들의 레퍼터리는 늘 왕년이지요

 

애인은 왕년에 다리 좀 떨었지요

어깨에 용 두 마리가 가끔 위협하지만 물거나 하지는 않더군요

 

친구는 왕년에 엄마 치맛바람으로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 앞에서 차를 대기해놓고 친구를 기다렸지요

 

아버지는 왕년에 여자 좀 울렸지요

애인들은 예뻤고 누구보다 많이 운 건 엄마였지요

 

나는 왕년이 없어요 저마다 근사한 왕년을 한 자락씩 걸쳤지만

이렇다 할 왕년도 없이 허겁지겁 살았어요

 

왕년을 갖고 싶어요 어디 싸고 반지르르한 왕년 없나요 창고정리 떨이처럼

만 원에 두 장인 왕년 없나요

 

왕년 하나 걸치고 어깨 좀 떨어보고 싶은데

오늘도 삼겹살집에 매여 있네요

 

왕년이 있던 사람들은 어찌 지내냐구요?

 

애인은 늘 다리에 쥐가 나서 애를 먹고요

친구는 엄마의 치매에 생을 붙잡혔지요

아버지는 푸들처럼 꼬랑지 말며 지낸답니다

그래도 한 잔 하면 다들 두툼한 왕년을 어깨에 두르더군요

 

꼬부라진 혀가 퇴장할 시간이에요

휘청휘청 사람들 사라지면

패잔병처럼 남아있는 식탁 위 술병이며 안주들

기름때처럼 찐득거리는 왕년을 행주로 싹싹 닦아낸답니다 

(그림 : 신지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