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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 딸기는 파랗게 운다

누렁이 황소 2021. 10. 31. 13:19

 

덜 익은 맛은 자유로웠지

 

곧추세울 척추가 없는 삶

평생 바닥을 전전했던 딸기는

끝내 까만 본심을 드러내지

딸기를 키우면서

저 뻔한 눈가림을 못 배우는 엄마

한때 나의 안락이었던

엄마의 가는 팔

가느다란 줄기 끝에 와서야

비로소 빨갛게 익었지

 

​빗방울은 만개의 드럼 소리를 내고

딸기는 겁먹어 파랗고

 

껍질 없는 딸기는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참아

속이 뭉개지는 시절이 있었지

한 몸, 한 계절에서

먼저 익은 빨강과

덜 익은 파랑

 

파랑은 걸음을 기다려야 한다며 느릿느릿

삼월인가 문을 열면 바깥은 이월

꾹 참는 엄마의 추위가 있다

 

빨갛게 익은 딸기는 우는 일 따윈 없지

(그림 : 임종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