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유현숙 - 자미화 그늘

누렁이 황소 2021. 10. 27. 18:21

 

비는 기별 없이 와서 가까운 바다를 두들겼다

바닷가 절집이 물에 잠겨 있다

첨벙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물 고인 돌계단을 딛는

발아래가 염화다

문득 비 그치고

꽃잎 붉게 지는 동안

하루가 저물고 절집이 고요하다

자미화 그늘도 본래로 돌아가 누웠다

 

은빛소리라든가 눈엽이라든가 수첩에 적어 두었던 낱말들이

고요 속에서 낱낱이 눈 뜬다

 

미혹의 그늘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잠기고 매듭진 자리에서 저만큼까지 몹시

마음이 들고난 자리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지난 하루가 감감해지는 저만큼까지 몹시

 

절집에 저녁이 오고 어둠이 들고 가섭은 가고

떨어져 뒹구는 저 꽃빛 닿지 않은 기별인가

자미화(紫薇花)) : 배롱나무꽃,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부처꽃과에 속한 낙엽 소교목. 높이 3~7미터로 잎은 마주나고 윤이 나며,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붉은색이나 흰색 등으로 꽃이 핀다.

중국이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학명은 Lagerstroemia indica이다.

(그림 : 설종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