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이정희 - 거름
누렁이 황소
2021. 10. 2. 17:15
늘그막의 아버지
벗어놓은 양말이며 옷가지에서
거름냄새가 났다
그건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기하는 냄새였을까
그 옛날 장화를 벗을 때나
땀에 전 수건을 받아들 때 나던
그 기세등등한 냄새에서
초록을 버린 풀들이 막 거름으로
이름을 바꿀 때의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앙상한 등짝으로 부려놓은 풀 더미에 가축 오줌과 똥을 잘 섞는다
각자의 냄새를 지켜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날뛰던 것들이 오래 지켜온 습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냄새로 진동하던 것들이 고집을 버려 삭아지고 토
해내며 거름으로 될 때의 냄새가 난다 검은 흙빛 미지근한 열감으로 모든 냄
새들이 포기하여 뭉쳐진 거름
들녘을 키우며
아낌없이 주는 거름
깜빡 졸고 있는 그 틈에도
아버지의 밭은 성성했다
러닝셔츠 구멍 사이로
기력 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밭에
폭 삭은 거름 한 짐 뿌리고 싶은데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접어들었을까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