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장수양 - 연기령
누렁이 황소
2021. 9. 4. 11:07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긴 연기의 끝을 보고 있다 나는 필터
속의 깊은 어둠을 응시한다 이렇게 붉고 뜨거운 어둠을 처음 본다
이런 식으로 닳기 위하여 긴 길을 걸어간 적이 있었는데
새로 산 코트만 몹시 남루해지고 말았다
나의 몸은 아직 새찬 빗방울처럼 걸을 수 있다 차분하게
담배를 던지는 사람 호를 그리는 불티
나는 타들어 가는 불을 뱃속에 삼키며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사자마자 낡아버린 내 코트 같은 얼굴 하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자리는 재생되지 않는데
우리가 화상을 입은 순간은 어디서든 재생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 나도 호주머니 속에
라이터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생각은 흡연실에서 먹구름처럼 떠다닌다
헌옷처럼 사람의 얼굴을 뒤집어쓴 채
얼마간 나의 표정은 간지럽고 아프다는 듯 굳었지만
이제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반갑습니다 흡연실에서 만난 아저씨들 다정한 언니들
이렇게 뜨거운 붉은 어둠을 처음 보지요?
이렇게 낡은 우리들을 처음 만나지요?
(그림 : 박종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