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박미란 - 꽃무릇에게

누렁이 황소 2021. 8. 23. 13:08

 

벤치에 그가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건 아니지만 눈을 감은 듯

거친 몸뚱이조차 맡길 데 없는

 

그때 나는 그 옆을 지나다가

꽃무릇을 보고 있었어

 

잎사귀 없이 피어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는데

그걸 왜 굳이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를 훔쳐보다가

그 자리를 떠나오고 말았지만

 

이제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이야기들

 

가끔씩 나도 바닥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몸을 돌돌 말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몇 송이는 나의 애인처럼 왕관을 펼친 채 피어났어

 

같은 계절, 같은 공간에서

어떤 꽃은 찬란하고

또 어떤 꽃은 기가 막히게 누추한지

 

각자 피는 일에 집중할 때

 

그 안쪽은 너무 어둡거나 밝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림 : 문명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