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임성용 - 흐린 저녁의 말들

누렁이 황소 2021. 8. 19. 09:41

 

따뜻한 눈빛만 기억해야 하는데

경멸스런 눈빛만 오래도록 남았네

얼크러진 세월이 지나가고 근거 없는 절망

우울한 거짓말이 쌓이고 나는 그 말을 믿네

가난하고 고독한 건 그리 슬픈 일이 아니라네

진짜 슬픈 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용기도 헌신도 잃어버렸다는 것

잊힌 사람이 되었다는 것

무수하게 사라지는 저항의 말들

어디서나 기억에도 없는 낯선 얼굴들

당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흐린 저녁이 오고

중력을 잃은 바람은 나를 데려가지 않네

 

울지 말라는 말은 울다 죽으라는 말

쓸쓸한 말들이 마른 풀로 우거졌네

나를 떠돌던 그림자가 얼음나무로 굳어지면

누구에게 살아온 잘못을 빌어야 하나

 

저녁노을은 검은 수의를 하늘 건너편에 던지네

출렁이는 지평의 끝에 새가 헤치고 간 길이 있네

새들의 노래는 배우지 않아도 그 마음 알 수 있네

목이 긴 새들이 무슨 말을 나누며 쉼 없이 날아가네

(그림 : 김형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