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노수옥 - 엄마는 바리스타
누렁이 황소
2021. 6. 11. 15:45
아버지와 나를 볶는 일에 이골이 났지요
맛과 향을 골고루 갖춘
양질의 원두였던 아버지
한때는 엄마의 입안에서 혀끝을 유혹하는 휘발성의 남자였대요
이제는 탱글탱글 잘 익은 콩에 밀려
자루에 방치된 채 점점 산화되고 있어요
나른함과 나태를 일으켜 세우던 카페인은
탄닌의 쓴맛만 남아 엄마를 짜증나게 하지요
어쩌면 폐기처분 될지도 몰라요
지금 엄마의 관심사는
나를 최상의 맛과 향으로 볶아내는 일
나 더러 고양이 몸을 통과하라고 하네요
사향고양이 뱃속 같은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견딘 요나처럼 기도했어요
엄마의 맘에 쏙 드는 양질의 콩이 되겠다고
하지만 달달 볶아대는 엄마, 두 손 두 발 들었죠
자꾸만 세상과 믹스되는 나를 수없이 걸러내지요
오늘은 나를 최상의 루왁으로 로스팅 할 거예요
내 혀끝은 시나몬 향이 나는 고양이 맛을 느껴요
나를 영글게 했던 뜨거운 열대의 햇살과
미로 같던 고양이 뱃속을 통과한 기억을 지우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소프트한 맛으로
엄마 아닌 다른 여자를 유혹할래요
바리스타 엄마의 멋진 작품이 되어
(그림 : 김대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