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안행덕 - 배추 죽이기

누렁이 황소 2021. 5. 28. 08:10

 

아! 살겠다

​금방 버무린 김치 한입에

그녀는 변명처럼 입맛을 다신다

 

음양의 조화를 안다는 듯

무 배추 푸르게 땅심을 자랑하는데

요절낼 속내를 감춘 그녀

요리조리 살피는 척 알찬 놈 골라

단번에 쓰러트리고

조자룡 창도 검도 아닌 부엌칼

열십자로 휘둘러 조각을 낸다

무엇이 그녀를 부추기는지

피도 못 흘리고 아파하는 늑골에 굵은 소금

사정없이 뿌리고 물고문을 시작한다.

기절해 축 늘어진 그에게 뿌린 화끈한 고춧가루에

자백도 못 하고 숨을 거두니

영하의 냉장실에 안치를 시켜놓고

드디어 완전무장 해제를 하는 그녀

김장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아이고, 죽겠다는 소리 수백 번

그를 다섯 번 죽여 놓고

이제는 살겠다, 한다

(그림 : 남중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