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시(詩)

하미정 - 흔들리는 지우개

누렁이 황소 2021. 5. 27. 09:36

 

‘당신’이라 쓰고 기억으로 지운다

지울수록 닳아 없어지는 흔적

 

말랑거리는 너를 잘못 사 온 걸까?

단단한 너를 사 올 때까지

손가락은 슬퍼했다

 

지울 때마다 일어서는 웃음

싸움이 지워질 때까지 웃었지만

웃음이 자꾸 찢어진다

 

비우지 못한 시간, 흘러넘치는 휴지통

종이 밖으로 밀려난 당신의 문체

어디까지 지워졌나?

텅 빈 노트 안 흑심만 가득 차고

 

같은 자릴 계속 지우면 구멍이 생겨

지우기도 전에 엄살을 떠는

지우기엔 너무 긴 문장

 

당신의 마침표를 지우려 하면 먼저 지워져 있는 물음표

 

균열의 무늬에서 지우개를 잡는다

 

고작 몇 장의 당신을 지우기 위해 나는 잠시 흔들렸다

(그림 : 박찬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