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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란 - 그늘만 우두커니 저물다

누렁이 황소 2021. 4. 11. 17:10

 

칡, 보기만 해도 손톱에 까맣게 물이 든다

장마가 그치고 잠자리가 떼로 몰려오는 초복과 말복사이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지땀을 흘리며 칡을 베어왔다

 

꽃이 피기도 전에 날마다 베어지는 칡은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갔다

부들부들한 칡을 기다리는 시냇가의 아낙네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떡밥인양 척척 받아내었다

 

하얗게 벗겨낸 껍질은 창호지와 갈포가 되고

줄기는 소쿠리가 되는데

 

나는 빨간 운동화와 공주 그림이 그려진 공책이 갖고 싶어

어머니 곁에서 칡껍질을 벗겼다

그러나 종일 손이 검도록 벗겨낸 칡껍질의 값은

공책 한 권보다 가벼웠다

오후의 햇살이 시냇물에 기울자

저만치 마중 나온 아우들의 저녁이 강아지풀처럼 비틀대며 걸어왔다

고추잠자리처럼 붉어진 어머니의 하루가

그제야 보리쌀 한 되를 받고 불어터진 손을 닦을 수 있었다

 

땀범벅으로 꽃을 피우던 그해 여름

시냇가 능수버들 그늘만 혼자 우두커니 저물었다

(그림 : 김준영 화백)